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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에서 multiplication table/곱셈표가 있다. 우리는 한국에서 구구단을 배웠다. “구구단을 외자”라는 게임도 있다. 그런데 지구위의 모든 나라가 구구단을 가르치지는 않는다. 대신 어떤 나라에서는 12단도 가르치고 20단도 가르친다. 그렇다면 한국 사람들이 익숙한 이 구구단이 단지 한국인이 교육한 관습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뭔가 인간 본성이 가진 수학적 본성과 관련 있다고 해야 맞지 않을까? 물론 사막에서 혼자 자란 아이는 구구단을 배우지 않아서 모를 수 있다. 그러나 그 기본 원리는 변하지 않아서, 적당한 환경에 놓이게 되면 그 능력이 충분히 개발될 수 있는 것이다. 곱셈을 하는 방식은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 있는 일종의 자연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념 중에 우리 집에서만 통용되는 우리 부모가 가르쳐준 아주 자의적인 사항들도 있지만, 수학의 원리처럼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 심겨진 원리들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자연법이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상대주의가 판을 치고 있다. 모든 것이 상대적이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길이 아예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외부적 관찰과 실험을 통해서가 아니라, 내부적 관찰과 실험의 길을 통해서 가능하다. 바로 우리 인간의 마음을 통해서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남아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우리가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 볼 때, 내가 만들지는 않았지만 내 안에 이미 들어와 있는 법, 즉 양심의 법이 있다는 것을 안다. 이건 내가 아무리 버리고 싶어도 버릴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내 안에 그런 자연법이 들어와 있다는 것은 곧 그 법을 나에게 심어준 절대자가 외부에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누구나 양심의 법을 따르지 못한다는 자책감이 있다. 비록 “하나님”이란 구체적인 이름은 붙이지 않더라도, 내 마음속에 심겨진 자연법에 반하여 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수없이 실망하게 된다. 사실 이 세상에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그게 옳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바르게 살고 부정하게 살면 안 된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더 나아가 미워하면 안 된다는 것도 다 알고 있고, 시기하고 질투하면 안 된다는 것 역시 다 알고 있다. 이런 것은 굳이 성경을 통해 배우지 않아도 인류 모두가 다 보편타당하게 잘 알고 있는 것들이다. 그래서 바울이 로마서 3:9-12에 어떻게 선언하는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라고 하였다.사람들은 마음속에 심겨진 자연법을 통해 의로운 것이 무엇인지를 알면서도 그대로 살지 못하는 걸까? 이유는 오직 하나다. 인간이 스스로 의의 근본이 되시는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다. 탕자가 아버지의 곁을 떠나 세상으로 나간 것처럼 사람이 하나님의 곁을 떠나 세상으로 나가버린 것이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나? 하나님을 보는 영의 눈이 가려지고, 이제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망각하고 하나님 없는 죄악의 삶을 살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시고, 그 가려진 눈을 밝혀주셨다. 먼저 우리 마음속에 심겨진 양심의 법을 통해 우리를 준비시키시고, 자신의 인간적인 능력에 대해서 절망하게 하시고, 그 다음 예수님의 은혜로 우리를 다시 살려주신 것이다. 나는 양심의 명령 하나도 제대로 수행할 수 없는 사람이지만, 이제는 예수님이 은혜를 통해 새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보는 영적이 눈이 열려서,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감사히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송명희 시인을 아실 것이다. 이분은 목 아래를 가누지 못하는 분이다. 휠체어를 타고 다니고 말도 겨우 할 정도이다. 이렇게 아주 장애가 심한 분인데 감동적인 신앙시를 많이 썼다. 그 중에 하나가 “나 가진 재물 없으나”라는 시인데, 최덕신 씨가 이 시에 곡을 붙여서 은혜로운 찬양곡을 만들었다. 아마 여러분 들어 보셨을 것이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없지만,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이분에게는 자기 인생을 바라보는 특별한 눈이 있다. 그래서 자기 안에 들어와 계신 하나님을 보고, 그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감격의 마음을 그렇게 시로 표현한 것이다. 구원받은 자의 눈을 가지고 있기에, 이분은 많은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본 것이다. 그렇다면 몸이 성한 우리는 변명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아무리 하나님이 마음속에서 소리를 치셔도 알아듣지를 못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자연법으로 들어와 계시고, 양심의 소리로 들어와 계시고,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으로 들어와 계신 것이다. 우리가 믿음의 눈을 열어 그것을 보고 깨달으면 복된 삶이 열리는 것이고, 이것을 보지 못해서 하나님을 부인하면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그러져서 의미있는 인생을 살지 못하는 것이다. 축복합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