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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칼럼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르시고 선악과를 따먹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이건 악한 거야. 이건 선한 거야.” 이렇게 일일이 말씀해주는 게 싫어서, 스스로 무엇이 선하고 악한지 판단해서 행동하기 위해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데, 이것이 바로 교만죄입니다. 하나님 없이 스스로 판단하여 잘 살 수 있다는 것, 이것이 교만죄의 핵심이고, 이 교만죄 때문에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어떻게 남을 비판하는 죄에 연결이 될까요? 자기가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지 아는 사람은, 즉 영혼이 겸손한 사람은 섣불리 남을 비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그 사람이나 나나 별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저 사람에 비해서 훨씬 영적으로 높은 위치에 서있고 훨씬 더 거룩한 것같이 보이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둘 다 불합격인 것입니다. 자신의 의로 구원받을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주셔서 그분의 의를 믿는 믿음을 통해, 행함이 아니라 은혜로 구원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걸 똑바로 알고 있는 사람이 함부로 남을 비판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제대로 알지 못해서 아직도 교만에 빠져 있기 때문에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다가 보면 서로 비판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어떤 경우에는 비판하는 사람이 정말 객관적으로 볼 때 비판할 만하다 라고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정말 남들보다 예배에 더 충실하고, 봉사 많이 하고, 한번 일을 맡으면 끝까지 잘 해내고... 이런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이 어떤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면 많은 사람들이 그걸 귀담아 듣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비판의 경우는 그렇지 못하다는 사실입니다. 비판하는 사람이 정작 비판의 대상이 된 사람보다 못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예를 들어, 자기는 10가지 잘못하고 있는데 그런 사람이 1가지를 잘못하고 있는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고 정죄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입니다. 그런 모습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지, 마태복음 7장 본문에서는 자기 눈에는 큰 들보가 들어가 있는데 그건 못 보고 남의 눈속에 있는 티에 대해서만 비판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7장 3-4절,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아파트에 사는 어떤 부인이 있었습니다. 그 부인이 낮에 좀 한가할 때에는 응접실에 나와서 커피도 마시고, 신문도 보면서 시간을 보내는 데, 자연히 건너 집에 있는 응접실로 시선이 자주 갔나 봅니다. 왜냐하면 그 아파트는 골목을 하나 사이에 두고 또 다른 아파트와 나란히 서 있었기 때문에 골목 사이를 두고 서로가 응접실이 다 들여다보이는 것입니다. 건너 집에 있는 응접실에는 아주 고상하게 생긴 부인이 가끔 응접실에 나와 가지고 바느질을 하기도 하고, 책을 읽기도 했습니다. 서로 만나서 대화를 한 일은 없어도 서로 멀리 쳐다보는 사이가 된 것입니다. 어느 날, 이 부인이 여전히 응접실에 나와서 무심결에 건너편에 있는 부인을 바라보았는데 그 날따라 부인이 흐릿하게 잘 안보였습니다. 전처럼 선명하지를 않았습니다. 그러자 자기도 모르게 대뜸 그 입에서 무슨 말이 나왔느냐 하면 '원, 세상에 창문이나 제대로 닦고 책을 읽던지, 바느질을 하지. 저렇게 게을러서 책만 읽으면 뭐하나?' 하고 자기도 모르게 말이 튀어 나왔습니다. 한 두주가 지났습니다. 따뜻한 봄날, 봄 청소를 했습니다. 유리창들을 닦고, 집안의 구석구석에 있는 모든 쓰레기들을 다 치우고, 하루종일 열심히 청소했습니다. 그리고 오후 늦게, 피곤한 몸을 이끌고 커피 한잔을 들고 응접실에 와서 포근한 의자에 앉았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건너편집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건너 집에 있는 부인이 너무나 선명하게 잘 보이는 겁니다. 바느질하고 있는 부인이 그림을 보듯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럴 때 그 부인의 머리에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저 부인이 창문을 닦지 않아서 잘 보이지 않는다고 투덜거렸는데, 오늘 보니까 내가 창문을 제대로 안 닦아서 그런 일이 벌어졌구나. 아, 내가 이렇게 바보구나.' 하고 자기 스스로 깨달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비판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자기 창문을 닦지 않고 남의 창문 안 닦았다고 욕하는 사람입니다. 비판하는 사람이 누굽니까? 자기 눈에는 들보를 가지고 있으면서 남의 눈에 있는 티를 탓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모순을 안고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모순을 안고 있는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예배 드리고, 거룩하게 하나님 찾고, 남 보기에는 경건한 것처럼 기도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비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남들은 이 사람 눈속에 대들보가 들어있는 것을 보는데 자기만 이걸 못 보는 것입니다. 그러고서 남의 눈속에 들어 있는 그 자그마한 티를 보고 이러쿵저러쿵 비난을 하는데, 이런 사람을 가리켜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외식하는 자”라고 부르셨다. 자신의 실상과 말이 전혀 맞지 않는, 아니 정반대인 사람인 것이다. 5절,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그러면 우리에게 이런 의문이 생기게 됩니다. 우리가 남들이 잘못하고 있는 것이 보일 때, 그걸 그냥 모른 척 하고 지나가야 한단 말인가? 잘못을 잘못이라고 지적하면 무조건 신앙이 나쁜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에 보면 남을 판단하지 말라는 구절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악을 행할 때 신자는 선과 악을 구분하여 이 둘 사이를 판단해야 한다는 구절도 나옵니다. 예를 들어 고린도전서 5:12절을 보면, “밖에 있는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이야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하지 아니하랴?” 또 15절에 이렇게 이어집니다.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우리가 정말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면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고 모든 것을 그냥 좋게만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정반대로 우리는 옳고 그름을 판단해서 자신을 위해서 옳은 것을 선택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옳은 것을 선택하도록 독려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마태복음 본문에서 “판단하지 말라, 비판하지 말라.”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사랑의 동기가 빠진 비판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을 죽이기 위해 판단을 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판단은 가치중립적인 행위입니다.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이성의 역할입니다. 이걸 악한 목적을 위해 사용하면 우리의 거룩성을 망치는 나쁜 판단이 되는 것이고, 선한 목적을 위해 사용하면 사람에게 유익이 되는 좋은 판단이 되는 것입니다. 판단하게 될 때에 그것이 사랑의 동기였는가를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판단하지 않고 사랑하길 원합니다. 축복합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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