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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회학자가 지나간 19세기를 여성을 발견한 세기라고 말했고, 20세기를 어린이를 발견한 세기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21세기는 노인을 발견하는 세기가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인상이 깊었습니다. '어린이를 발견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말일까요? 예전에는 어린이가 하나의 인간이나, 인격으로 간주되기보다 부모나 사회의 부속물 정도로 취급되어 왔었다는 것입니다. 1920년대 대한제국은 일본의 식민지로 있을 때 만해도 어린이라는 말조차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당시에는 어린이들은 이놈, 어린 것, 애새끼라는 말로 불리 우고 있었습니다. 당시에 일본 유학생이었던 소파 방정환 선생은 이를 안타깝게 여겼습니다. 민족의 미래는 다음세대를 귀히 여기는데 있다고 확신한 그는 여름방학을 맞아 귀국했을 때 존대 말 쓰기 운동을 벌렸습니다. 이때 처음으로 '어린이'(어리신 이)라는 말을 사용했고 어린이도 하나의 인격체임을 선언했습니다. 이것이 1921년의 일이었고, 다음해인 1922년 5월1일에 처음으로 '어린이 날' 제정을 제안하고, 1923년에는 순수아동잡지 '어린이'를 창간하게 됩니다. 그해 5월1일 아동문화운동단체인 '색동회'를 창설하게 됩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어린이날의 유래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린이를 어떻게 생각하셨을까요? 한마디로 예수님은 시대적으로 이천년을 앞서 가셨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유명한 질문을 하신 후 갈릴리 가버나움으로 오시던 도중에, 제자들 사이에 "천국에서 누가 더 큰 자가 될 것인가?"라는 논쟁을 듣게 되셨습니다. 이런 제자들에 대하여 진정한 천국백성의 자격을 가르치기 위한 시청각적 샘플로서 '어린이 하나'를 불러 그 앞에 세우시고 어린이에 대한 교훈을 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어린이관을,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린이를 통한 '천국 백성관'을 들여다보게 하셨습니다.


어린 시절, 가난한 환경이 저에게 허락되었습니다. 그때는 가난이 싫었습니다. 부끄러웠습니다. 부유한 환경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부러웠습니다. 전학과 이사를 자주 했습니다. 어린 시절의 이별과 슬픔, 눈물이 모자이크 무늬처럼 기억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돌아보면 그 가난이 제게 축복이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가난해 보았기 때문에 많은 것을 배우게 하셨습니다. 가난 때문에 인생의 깊이를 알았고 가난한 친구들을 많이 사귀었습니다. 나눔의 소중함도 알았습니다. 전 세계에 불우한 어린이들을 돕고자 하는 마음을 주셨기에 남미에 어린이들을 돕는 선교사와 선교센터를 통해서 제 아내도 만나게 되었습니다. 중남미의 어린이들을 돕는 선교단체에서 일도 해 보았고 선교사로 보냄을 받았습니다. 어린 시절 가난을 불행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습니다. 가난은 약간 불편할 뿐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가난은 사실 많이 불편하고 부당한 일을 겪게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때마다 이겨온 것은 기도였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의 기도가 그 뒤에 있었습니다. 어린이는 밥을 먹고 자라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먹고 자랍니다. 또한 기도는 어린이의 생명 줄입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어린이들을 기도와 사랑으로 키워야 합니다. 매로 키어야 할 나이가 지났습니다. 이젠 기도로 자녀들을 양육하고 키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오클랜드 교회에 어린이들이 시끄럽게 뛰어 노는 것이 참으로 가슴 뛰게 하는 일입니다. 어린이들 때문에 예배가 방해가 되더라도 어린이들이 떠드는 소리가 오클랜드교회의 희망이고 미래입니다. 어린이들을 만날 때마다 마음 깊이 축복해 주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어린이들안에 꿈이 있습니다. 엄청난 잠재력이 있습니다. 말할 수 없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어린이들을 무시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어린이들과 어린이들을 가진 부모님들에게 우리의 가장 소중한 인생의 유산, 신앙의 유산을 남기고 투자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어린이들이 한결같이 미래가 밝은 것은 결코 아닙니다. 가난하고 불우한 전 세계의 어린이들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나눔은 사랑의 실천입니다. 예수님은 철저히 나누는 생애를 사셨습니다. 자신의 몸을 철저하게 깨뜨려 나눔의 삶을 사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보여 주신 사랑이 바로 나눔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소유하기 위한 삶이 아니라 나눔을 위한 삶이었습니다. "주님 당신의 생애는 그렇게도 철저한 나눔의 생애로 부서졌건만 우리의 날들은 어찌 이리 소유를 위해서만 숨이 차게 바쁜지 수시로 당신 앞에 성찰하게 하소서. 진정 당신 안에서가 아니면 나눔의 참뜻을 알지 못하는 우리에게 당신이 세상에서 모범을 보이신 대로 아낌없이 모든 것 내어 주고도 한 끝의 후회가 없는 너그럽고 순수한 마음을 주소서." 축복합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