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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트베이의 청명하기 이를 데 없는 맑은 하늘을 보면 마음이 시원해지다가도 괜히 서러워집니다. 윤동주는 1942년 1월 말 경에 <참회록>이라는 시를 썼습니다.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이다지도 욕될까". 겨우 스물 네 살에 불과했던 시인은 왜 이런 자괴감에 사로잡힌 것일까요? 그때 그는 일본 유학을 앞두고 있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창씨개명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사실이 이 예민한 젊은이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탄식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는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어 보자"고 다짐합니다. 여기서 '거울'은 마음을 이르는 은유일 것입니다. '닦어 보자'고 말하는 것은 자신의 본바탕이 맑음임을 잊지 말자는 다짐일 것입니다. 자칫하면 수치와 부끄러움에 떠밀려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수치와 부끄러움을 자기 삶으로 수용하면서도 자기 마음의 본바탕을 잃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 하고 있습니다. 윤동주의 거울만 흐린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거울도 흐리지 않은가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본래의 모습을 잃은 채, 파란 녹이 낀 모습을 그냥 우리 현실로 수용한 채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우리 눈길을 사로잡는 것들을 따라가느라 숨이 가빠서 우리가 본래 가야 할 곳을 잊고 사는 것은 아닌지요? 겉사람을 가꾸는데 진력할 뿐 속사람을 잊고 사는 것은 아닌지요? 자신에게 몰두하느라 함께 살라 하신 이웃들의 고통을 모른 체 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덧거친 세상사에 시달리는 동안 입은 마음의 상처 때문에 온통 자기 연민에 사로잡힌 채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마음을 자꾸만 본래의 자리에 되돌려놓기 위해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우리는 어둠이 지배하는 세상에 속절없이 끌려갈 수밖에 없습니다. 순간순간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여쭙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지 않는 한 우리는 결핍과 욕망, 아픔과 자기 연민에 사로잡힌 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부자유한 삶이고 타락한 삶입니다. 성공회의 수장인 캔터베리 대주교였던 로완 윌리엄스는 예수님의 삶을 연주자들에 빗대어 설명했습니다. 가수나 연주자들은 혼신의 힘을 다하여 다른 이들의 작품과 비전에 생명을 불어넣습니다. 연주가 이어지는 동안 작곡가의 상상과 비전은 연주자의 존재를 '가득 채우며' 나오게 마련입니다. 그때 사람들은 감동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목적을 쉼 없이, 음정을 놓치거나 박자를 틀리는 일이 없이 온전히 표현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예수님의 삶을 보시고 세상을 위해 바치신 그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바치는 기도에 응답이 없다면 우리 삶이 하나님의 선율을 혼신의 힘으로 연주하는 삶인지 먼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기 아픔 때문에 우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아픔 때문에 우는 사람, 자기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서 간구하는 분의 기도를 하나님이 어찌 외면하실 수 있겠습니까? 불의한 세상에서 부르짖는 의인들의 기도가 마치 허공을 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때와 하나님의 방법을 신뢰해야 합니다. 진실한 기도는 헛되이 흩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기도를 드린 후에는 그 기도가 응답된 줄로 믿고 살아야 합니다. 기도는 바라는 바를 아뢰는 것(祈禱)이기도 하지만 바라는 바를 기획하고 도모하는 일(企圖)이기도 합니다. 영국교회의 아침 기도문에는 "오늘 하루, 나의 삶이 누군가가 주님께 바친 기도의 응답이 되게 해달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런 진실한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고난을 당하심으로 하나님과 말씀에 대해서 순종하셨습니다. 우리가 읽고 있는 로마서를 통해 한 바울 사도의 말을 기억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이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을, 누가 감히 고발하겠습니까? 의롭다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신데, 누가 감히 그들을 정죄하겠습니까?"(롬8:31, 33-34a). 복음에 대한 순종을 통해 믿음을 배웁니다.(롬10:16) 베드로와 사도들은 당국의 명령을 어기고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쳤다며 위협하는 대제사장에게 "사람에게 복종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 마땅합니다"(행5:29) 하고 응대했습니다. 고난을 통해 자유에 이른 사람의 말입니다. 이런 이들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도 자발적으로 고난 속으로 걸어들어가심을 통해 하나님의 뜻 안에 확고히 거할 수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신 예수님은 마침내 완전하게 되셨다고 말합니다.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시고 마침내 완전하게 되신 예수님은,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 순종한다는 말은 주님의 길을 자기 길로 삼는다는 말입니다.

대제사장 혹은 교황을 이르는 말이 폰티프(pontiff)인데 이 말은 로마의 대신관을 가리키는 pontifex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폰티펙스는 본래 '다리를 놓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대제사장 예수라는 말이 어색하거든 다리를 놓는 사람 예수라고 바꿔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은 하늘과 땅 사이에 다리를 놓으셨습니다.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 거룩한 것과 속된 것 사이, 남자와 여자 사이에 다리를 놓아 서로 소통하게 하셨습니다. 에베소서는 예수님이 양쪽으로 갈라져 있는 것을 하나로 만드심으로써 모두가 한 가족이 되어 살도록 하셨다고 말합니다(엡2:11-22). 예수를 따르는 이들이 있는 곳에서 이러한 사건이 자꾸 일어나야 합니다. 화해의 사절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삶으로 연주해야 할 하늘의 선율은 평화와 생명이어야 합니다. 축복합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