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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강단교환주일입니다. 연합감리교회의 북가주 코커스에서는 해마다 이 주일을 통해서 모아진 헌금을 통해 개척교회를 돕거나 자립하지 못하는 교회를 도와 왔습니다. 오늘 말씀을 전해 주시는 목사님을 통해서 “온갖 참된 삶은 만남”이라는 것과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주님의 마음을 아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한 율법교사가 일어나서 예수님께 질문을 던졌습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그 질문에 담겨있는 불순한 동기를 모를 리 없건만 예수님은 친절하게 응대해주십니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하였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고 있느냐?” 율법학자는 마치 자동응답기인양 주저없이 대답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였고, 또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하였습니다.” 우리도 잘 아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야말로 성경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율법학자의 대답은 군더더기조차 없이 명료합니다. 주님은 그에게 아주 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네 대답이 옳다. 그대로 행하여라. 그리하면 살 것이다.” 예수를 시험하려던 그의 의도는 빗나갔습니다. 오히려 곤경에 처한 것은 그 자신이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라고 물었지만 그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실천의 문제를 또다시 이론의 문제로 환원시키려 합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이 질문 속에는 자신의 불순종을 정당화하려는 사람의 절망감이 배어 있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들려주신 게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입니다. 예수님은 이론적인 질문에 이론적으로 답하기보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관개 시설이 잘 되어 있던 여리고는 ‘천 그루의 종려나무의 도시’로 불릴 정도로 숲이 울창한 도시였습니다. 헤롯은 그곳에 겨울 궁전을 지었고, 많은 제사장들이 그곳에 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은 아주 척박하고 황량한 광야 지대였습니다. 황량한 산허리에 있는 동굴은 강도들이 몰려들기에 적합했습니다. 불운한 한 사람이 그 길에서 강도를 만나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사회적 신분을 보여주는 옷조차 벗겨진 그는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무력한 익명의 사람일 따름입니다. 누군가가 발견하고 도움을 주지 않는다면 그 황량한 광야에서 생을 마감해야 할 형편이었습니다. 마침 그 현장 곁을 제사장 한 사람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늘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걷던 길인데 그 끔찍한 폭력의 현장을 보게 되었으니 많이 놀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는 마치 아무 것도 보지 못한 것처럼 딴 곳을 보며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났다고 말합니다. 얼마 후 한 레위인도 그 현장을 지나갔지만 그도 역시 눈길을 돌리고 말았습니다. 그 가련한 사내의 생은 그렇게 끝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야기는 그들의 예측과 기대를 비켜갑니다. 전혀 예기치 않았던 한 인물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그도 똑같은 현장을 보았지만, 그의 반응은 좀 달랐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보고 피하여 지나갔지만, 사마리아 사람은 그 강도 만난 사람에게 다가가 상처에 올리브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에, 자기 짐승에 태워서,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주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그는 다음 날 여관주인에게 두 데나리온을 주며 “이 사람을 돌보아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오는 길에 갚겠습니다” 하고 말합니다.

주님은 의도적으로 사마리아 사람을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을 보며 그가 속한 나라, 계급, 인종, 종교를 묻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사람의 등장을 못마땅하게 여겼을 청중들의 일그러진 마음을 폭로하고 계십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을 비웃고 있었지만 그들 또한 자기중심적 사고에 사로잡힌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와 ‘그들’을 나누는 일에 익숙한 사람들이었다는 말입니다. 우리도 다를 바 없습니다. 이민와서 차별받으면서 피부색이 다르고, 종교가 다르고, 나라가 다르고, 가난한 사람들을 보면 우리 또한 그들을 암암리에 무시합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전혀 다른 동기에서 움직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강도만난 사람에게 다가간 것은 종교적 신념 때문이 아니라 ‘측은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 마음을 얻지 못한다면 우리 믿음의 고백이 무슨 소용이 있겠으며, 만 권의 책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문제는 내적 변화입니다. 측은히 여기는 마음, 누군가의 불행을 차마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마음, 그래서 그의 앞에 멈춰 서고, 그를 위해 시간과 물질을 쓸 때 비로소 우리는 믿음의 자리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여기서 ‘이웃이 누구냐?’는 본래의 질문을 ‘누가 이웃이 되어 준 것이냐?’는 질문으로 돌려놓고 계십니다. 율법학자는 마지못해 대답합니다.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여라.”

주님을 믿고 살아간다는 것은 누군가의 이웃이 되는 것입니다. 이웃이 된다는 것은 나를 향한 그의 요구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할 수 없는 일까지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그만입니다. 우리 교회도 어려운데 왜 이웃의 교회, 개척교회를 도와야 하는지 에 대해 주님은 되묻습니다. “누가 이웃이 되어 준것이냐?” 물론 누군가의 요구에 응답하기 위해서는 위험을 무릅써야 할 때도 있고, 시간과 비용을 들여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이 비유를 묵상하면서 제가 바로 제사장이요 레위인임을 절감했습니다. 사순절을 시작했습니다. 이 세상은 이처럼 사람들의 무너진 마음을 일으켜 세우고, 냉랭한 세상에 봄 소식을 가져오는 영적 사마리아인들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강도 만난 이웃들을 향해 나아가라는 주님의 거룩한 소명에 응답하며 사는 오클랜드교회의 모든 지체되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합니다.